맨위로가기

원주 김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원주 김씨는 경순왕의 후예 김거공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 원성백에 봉해진 김거공의 후손들이 원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주요 인물로는 좌의정을 지낸 김응남, 우의정을 지낸 김덕원 등이 있으며, 문정공파, 병판공파, 대경공파 등 여러 분파로 나뉜다. 원주 김씨는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특별자치도 등 전국 각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원주 김씨 - 김응남
    김응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예문관, 홍문관을 거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며 선조를 보필했고 남응운, 김상용과 함께 전서의 대가로 이름을 알렸으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폄하 및 원균 옹호 발언 논란이 있었으며, 사후 호성공신 2등으로 원성부원군에 추봉, 관련 문화재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 원주 김씨 - 김덕원
    김덕원은 조선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숙종 때 갑인예송으로 남인으로 활동하다가 경신환국 이후 서인 정권에서 중용되었고, 기사환국으로 우의정에 발탁되어 남인 정권을 이끌었으며, 갑술환국으로 유배된 후 향리에 은거했다.
원주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씨원주 김씨
原州金氏
한자原州金氏
나라한국
관향강원도 원주시
시조김거공(金巨公)
원시조김알지(金閼智)
집성촌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광판리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양곡리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함경남도 문천시 운림면 인흥리
주요 인물김응남, 김덕원
년도2000
인구10,978명
비고원주김씨 대종친회

2. 역사

원주 김씨의 시조 '''김거공'''(金巨公)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의종 때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지고 원성(原城)을 식읍으로 받았다.[1] 이후 후손들이 원성(현 원주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8세손 김득우(金得雨)는 고려 후기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의 손녀 사위이자 신수(申璲)의 사위로, 고려 말 충주목사(忠州牧使)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0세손 김연지(金連枝)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대경공(戴敬公)이다.

14세손 김응남(金應南)은 문과에 급제,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김응남의 조카 김준룡(金俊龍)은 무과 출신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양공(忠襄公)이다. 김준룡의 손자 김덕원(金德遠)은 문과 출신으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경순왕의 후예인 '''김거공'''(金巨公)은 초명이 '김자표'(金子彪)이다. 그는 고려 때 서리(胥吏)와 내시(內侍)를 거쳐, 1142년(인종 20) 금(金)나라 동경(東京)을 다녀온 후 고려 의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고, 원성(原城)의 식읍(食邑)을 받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1] 이후 후손들이 원성(原城 : 원주)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8세손 김득우(金得雨)는 고려 후기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의 손서(孫壻)이자 신수(申璲)의 사위이다. 고려 말 충주목사(忠州牧使)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10세손 김연지(金連枝)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이었으며, 시호가 대경공(戴敬公)이다.

14세손 김응남(金應南)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김응남의 종질(從姪) 김준룡(金俊龍)은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였으며 시호는 충양공(忠襄公)이다. 김준룡의 손자 김덕원(金德遠)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이었다.

2. 2. 고려 후기 ~ 조선 초기

시조 '''김거공'''(金巨公)은 경순왕의 후예로 처음 이름은 '김자표'(金子彪)였다. 고려 때 서리(胥吏)와 내시(內侍)를 거쳐, 1142년(인종 20) 금(金)나라 동경(東京)을 다녀온 후 의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거쳤다. 고려 의종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고, 원성(原城)의 식읍(食邑)을 받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1] 이후 후손들이 원성(原城 : 원주)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8세손 김득우(金得雨)는 고려 후기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의 손자 사위이자 신수(申璲)의 사위이다. 고려 말 충주목사(忠州牧使)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10세손 김연지(金連枝)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대경공(戴敬公)이다.

14세손 김응남(金應南)은 문과에 급제하고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김응남의 종질(從姪) 김준룡(金俊龍)은 무과 출신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양공(忠襄公)이다. 김준룡의 손자 김덕원(金德遠)은 문과 출신으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3. 본관

원주(原州)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 또는 치악성(雉岳城)인데,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북원경(北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원주(原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바꾸어 열월군과 제천군을 속군으로 평창현·단산현·영춘현·주천현·황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큰 군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260년(원종 1)에 원주군으로 복구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에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개칭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원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성안부(成安府)로 강등되었다가 1353년(공민왕 2)에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원주목을 유지했으며, 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 영(營)이 위치한 행정 중심지였다. 1683년(숙종 9)과 1728년(영조 4)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를 실시함에 따라 강원도의 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 소속의 원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도제 실시로 강원도 원주군이 되었다. 1955년 원주읍이 원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1989년 원성군을 다시 원주군으로 개칭하였고, 1995년 원주군이 원주시에 통합되었다.

4. 분파

파명파조
문정공파(文貞公派)김득우(金得雨)
병판공파(兵判公派)김말손(金末孫)
감찰공파(監察公派)김안조(金安祚)
찬성공파(贊成公派)김안우(金安祐)
파강공파(巴江公派)김두남(金斗南)
충양공파(忠襄公派)김준룡(金俊龍)
휴곡공파(休谷公派)김덕원(金德遠)
두암공파(斗巖公派)김응남(金應南)
부사공파(府使公派)김기남(金起南)
대경공파(戴敬公派)김연지(金連枝)


5. 주요 인물


  • 김응남(1546년 ~ 1598년):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8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의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한 삼사의 송응개·허봉·박근원 등이 선조의 노여움으로 유배될 때 그들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평소 이이를 존경했기 때문에 실제로 삼사의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585년 우승지로 기용되고 이어 대사헌·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갔다. 귀국 후 한성판윤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왕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가 되었다. 1593년 이조판서로서 왕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류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안무사로서 영남 지방에 내려갔다가, 풍기에서 병이 위독해져서 귀경 후 사직하고 이듬 해 죽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1]
  • 김덕원(1634년 ~ 1704년): 1662년(현종 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에 홍문록에 오르고,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이어 병조참판·형조참판·한성판윤·경기감사·예조판서 등을 거쳤고, 1684년에는 사은부사로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바뀌자 곧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국을 주도했고,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우의정을 사임하였다. 그 뒤 갑술환국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711년 신원되었다.

6. 집성촌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